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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9-23 00:00

구두의 주인

손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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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의 주인>



그날도 아들이 들어오는 기척을 알지 못했다. 새벽기도를 가기 위해 거실 문을 열자 지친 신발들 위에 낮선 여자구두가 동그랗게 올려져있다. 순간 많은 추측을 하다가 추측이 실망을 불러 오기 전에 현관을 나섰다.

의도와는 달리 기도 시간 내내 구두의 주인이 궁금하여, 집에 들어서기 바쁘게 아들 방문을 숨죽여 열었다. 긴 생머리의 아가씨가 엎드려 잔다. 그 모습에 움칠 놀라다가 안도하는 자신에게 더 당황한다.

얼른 감정정리를 하고 비어있던 방문을 열었다. 비밀 첨 보원이나 된 듯 아들에게 옆방으로 고개 짓을 하자, 아들은 잠꼬대처럼 “우연히 여행 온 선배를 만났다” 는 것. 괜한 걱정을 했다는 생각이 남편에게 장난 끼로 발동되었다.

이제 별 은밀할 것도 없는 한 곳만 가리고 거실에서 자는 남편의 귓전에 속삭였다. “아들 방에 아가씨 손님이 자요!” 남편은 뻥튀기처럼 튕겨 일어났다. 장성한 자매를 두었지만 아이들 이성에 대해 아는 것이 없던 내외는 은근한 기대에 들떴다.

아침준비를 하다가 어질러진 집안을 보자 변명 할 수 도 없는 짜증이 인다. 바쁘다는 핑계로 대충 산 살림살이가 등을 떠밀어 이른 출근을 하고 말았다. 남편으로부터 구두의 주인을 보지 못했다는 통화를 한 후 그날일은 까맣게 잊고 지냈다.

아들이 집에 왔으나 한가한 식사 한번 못하다가 횟집에 앉았다. 이른 시간이라 조용한 식당에서 뜬금없이 남편은 ‘구두의 주인, 에 대해 설명듣기를 원했다. 가부장적인 남편이 마신 술 한 잔 없이 아들과 마주 앉아 있다는 건 힘든 일. 재빨리 남편이 내어 준 말머리를 잡았다.

아들은 간밤에 꾼 꿈이라도 기억하려는 듯 한 순간 멍한 표정이더니 이내 이야기를 풀었다. 그날 친구들과 헤어져 집으로 걸어오던 중 “저기요!” 하는 소리, 바람처럼 들렸으나 음악에 집중해 있어 지나쳐갔다.

듣던 곡이 끝나자 ‘저기요’하던 소리가 메아리로 따라와서 마음 한 곳을 여리게 흔들었다. 발걸음을 되돌려 간 도로 턱에는 무릎을 안은 여자가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고 있다. 여자가 고개를 들고 희미하게 웃었고 아들은 귀를 기울이며 앉았다.

E시에서 친구들과 함께 왔다가 술이 취해 친구도 지갑도 잃어 버렸다는 여자. 10센티나 되는 망가진 구두 뒤축이 그녀의 고단함을 폭로했다. 그 바람에 찜질 방으로 데려다 주려던 생각을 지우고 집으로 오게 된 것. 아들이 그녀에 대해 아는 것은 서른은 넘어 보인다는 다분히 주관적인 생각뿐이었다.

잔뜩 기대를 하고 있던 우리 내외는 “물놀이”를 소리 나는 데로 쓰세요. 란 문제에 ‘풍덩, 이라 쓴 시험지를 받아 들었을 때처럼 할 말을 잃었다. 때맞추어 회가 들어오고 부자간에 몇 번의 술이 오가자 경찰관으로서 30여 년간 사건을 접한 남편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나는 남편의 말을 흘려들으며 아들에게 하고자 하는 아버지의 염려를 요약한다.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로부터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간다.” 로 번역되는 요지를 남편은 두꺼운 판례집으로 다룬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나는 술을 치고 술은 답답하던 남편의 가슴에 아들 닮은 별 하나 받아 안겼다.


* 창세기39장 7절-23장내용. 보디발의 아내는 준수한 요셉을 유혹하다 실패하자, 요셉이 자신을 희롱했다고 누명을 씌워 감옥으로 보낸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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