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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5-10 00:00

아들과 함께한 480시간

손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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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12월16일 침대모서리에 앉아 아들과 궁색한 한 끼를 해결하다말고 피식 웃음이 났다. 파트너만 바뀌었지 지난해 딸과 네팔에서의 한 장면을 복사한 것 같다. 한국은 가장 추운 날을 지나고 있다는데 호주 중부 다윈은 40도를 넘나드는 여름이었다. 그 지역은 습도가 높아 대부분의 사람들이 크리스마스휴가로 썰물처럼 빠져나가 한산했다. 


그 여파로 우리는 숙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외시즌이라 유명한 투어들도 대부분 문을 닫았다. 숙박비가 성수기에 비해 저렴했지만 호주달러가 가장 비쌀 때 여행 중이던 우리에게는 그것도 부담이라 문을 닫아 못 하게 된 투어가 내심 다행이다 싶었다.

한국에서 바쁘게 보내던 나는 침대에 뒹굴면서 마냥 행복했다. 온통 아들을 차지 한 것이 고지를 점령한 장군의 마음 같다. 아들과 온전히 하루를 보냈던 적이 언제인지 기억에도 없다. 호주에서 480시간을 저당 잡힌 아들은 착잡한 모양이다. 가족과 친구들, 방학과 연말을 포기하고 남의 나라에서 영어와 돈, 두 마리 토끼를 잡겠다는 아들을 따라 나선 무모한 어미 때문일 게다.


국내선을 네 번이나 갈아타며 호주의 중남부를 밟았다. 도시에서 도시를 가기 위해 버스로 이동 한다는 것은 엄청난 시간과 경비를 투자해야 하기 때문에 저가비행기가 대중교통이나 다름없었다. 기본10시간 이상을 달려야 하는 넓은 땅에서 한국의 좁은 땅덩어리가 참 편리한 면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초원을 달리던 맹수가 우리에 갇힌 것처럼 아들은 한동안 느긋한 일정에 적응하지 못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 빵을 곁 드린 차 한 잔과 여유로운 한담, 심심하면 실내 수영장에 잠깐 몸을 담그고 시간을 꼭꼭 씹어 먹는다. 가끔 책도 읽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기도 한다. 해거름이면 바다를 앞에 두고 잔디가 잘 다듬어진 공원에 앉아 수년의 공백을 메우듯 서로에게 집중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호주에서의 계획과 여행일정, 처음 듣는 여자친구이야기, 아들에게 핀잔들은 남의 이야기까지 과거를 통과하며 미래를 설계했다. 1년 동안의 노동 값을 선불해 여행을 계획하면서 많이 망설였다. 심지어 예약한 비행 티켓을 취소도 했었다. 그런 나에게 “엄마, 다 잊고 같이 보내는 시간에 모든 것을 배팅하자”는 아들의 한마디가 힘이 되어 함께 떠났다.


호주의 배꼽 원주민들의 영적인 장소 울루루에서 아들과 싸웠다. 남들 다 찍는 사진을 같이 찍지 않는다는 이유로 나는 삐쳤고, 아들은 한 장의 사진에 자신의 추억을 매장시키지 않겠다고 맞섰다. 브리지번에 도착 후 이튿날, 바이런베이의 환상적인 파도를 남들은 수상스키를 타며 놀지만 우리는 모래밭에서 두꺼비 집을 만들고 성을 구축하며 점잖게 놀았다.

다윈에서는 밀림을 끼고 흐르는 강을 따라가며 악어를 불렸다. 어린 악어는 줄까 말까 농간을 부리는 선장에게 몸부림을 치며 사람들의 환성을 자아냈으나, 큰 악어는 기다리며 신경전을 하다가 미끼를 한 순간에 낚아채어 먹이만 날린 꼴이 됐다. 내 삶도 한 때는 어린 악어 같았다.

태평양에서 배낚시는 유일하게 우리 둘만 입질도 못했다. 평소 낚시에는 일가견이 있는 아들은 배 멀미가 나서 안  된다며 극구 면병을 했고, 나는 잡았다가 놓아주는 일이 번거롭다며 애써 실망하지 않는다. 멜번에서는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팽귄을 보았지만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다. 수백 명의 관광객이 촬영금지라는 가이드 말을, 순한 양처럼 잘 들어 청개구리인 나도 감히 폰조차 사용 할 수 없었다. 다만 몰래 몰래 핸드폰으로 아들의 옆모습  몇 컷 찍었을 뿐이다.  


여행을 이틀 남겨 두고 남, 여 8인실로 헤어져 잤다. 돈도 모자랐지만 싸운 여파도 있었다. 모든 경비를 아들이 가지고 있으면서 내가 사고 싶은 팽귄, 코알라, 캥거루인형을 비싸고 짐만 되니 한국 가서 사라며 못 사게 했다. 열 살 무렵 죽음과 대면했던 나의 상처는 인형에 집착하는 버릇이 있다. 직접 옷을 만들어 입힌 스물여덟 살의 비비 인형도 있으니 고민해 볼 일이다. 처음엔 어린 조카들이 온다하면 인형들을 감추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  이제 조카들은 조르지 않는 인격이 되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 멀어진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집을 떠나면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성격이다. 몸을 부리고 있는 현실, 내 눈을 유혹하는 볼거리를 향해 불나방처럼 쫒아가는 일에만 열심을 낸다. 아이들이 걸음마를 시작하면 무턱대고 달아나는 것처럼 눈만 떼면 사라지는 어미를 잃어버릴 가 봐 아들은 동동 거렸다.

오래전 내가 했던 “ 비싸, 나중에 사줄게”라는 그 말을 아들에게 돌려받으며 반성을 했다. 집요한 나는 아들에게 돈을 똑 같이 나누어 투어 외엔 각자 놀자고 제안 했고, 투어 중 잠깐 실종 된 어미 땜에 혼이 난 아들은 숙소 주소와 전화번호, 자기휴대폰 번호를 여러 군데 적어, 내 가방에, 주머니에, 넣어주며 신신 당부를 한 후 밤낮으로 돌아다니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원하던 인형을 샀고, 아들에게 빌린 수동 카메라로 사람이 가장 많이 다니는 교차로 앞 밴치에 앉아 그간 못 찍었던 사진을 원 없이 찍었다. 사진이 나온다는 보장은 없다. 게을러서 작동 법을 배우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다. 까만 사람, 흰 사람, 뚱뚱한 이, 홀쭉한 이, 오가는 사람들 구경하며 하루를 보내는데 아들이 어미도 못 본체 지나간다.

나도 모르게 반가워서 아들을 부르려다 말고 슬금슬금 뒤따라가며 아들을 담았다. 그날은 정말 신나는 날이었다. 결국 배터리가 다 되고서야 숙소로 돌아와 무료반찬 코너에서, 누군가 두고 간 고기멸치 고추장 볶음에 햇반을 데워 먹으니 만사형통이다. 그간 싸다는 이유로 빵과 컵라면을 심심찮게 먹었다는 것을 기억 해 낸 것이 맛의 비결이 아닐까싶다.


 우리가 머물던 숙소는 호주전국에 흩어져 있는 체인점 중 한 곳이다. 가격도 저렴하고 실내수영장도 갖춘 배낭여행객에겐 좋은 대형 주방시설과, 넓고 안락한 휴게실에는 미니당구대. 인터넷, 책이 구비 되어있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여행객들이 마트에서 사온 재료로 각자 자기나라 음식을 만들어 먹기에 주방에서 요리하는 것을 구경하는 재미도 그만이다.

일정의 마지막 하루는 낡았지만 사람의 몸을 고스란히 받아주는 쇼파에 누워 가져간 미니성경을 보며 보냈다. 그러다보니 내게 배당된 돈은 60불이 남았는데 아들은 공항 가는 경비30불 마저 써버리고 없었으니 또 끼니 둘을 한번에 해결 할 수밖에 .


사전 준비를 완벽하게 하는 딸과는 달리 아들은 덜렁 비행티켓만 들고 어미를 데리고 갔다. 그 결과는 참으로 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어 냈고 고생도 꽤나 했다. 20일간의 여행 내내 우리 모자는 가장 낮은 자리에 앉으려 노력했고, 먼저 주의 의를 구하다 보니 곳곳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예비하심을 체험했다.

여행 마지막 날엔 비행기가 취소되면서 하루 더 멜번에 머물게 되었다 공짜로 말이다. 이틀간 헤어져 잤던 우리가 덤으로 얻은 하루를 멋진 호텔에서 피로를 풀며 하나님 말씀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신실하신 하나님의 배려였다. 짠돌이 아들이 호주에서 일자리 구 할 때 까지 쓰려고 알바해서 모아 간 돈으로, 근사한 저녁도 샀으니 여행 하면서 입에 익은 땡큐가 절로 나왔다.


황재처럼 먹지는 못했지만 황재보다 행복한 여행을 마치고 ,아들을 두고 떠나 온지 6개월이 되어간다. 많은 사람을 사귀되 진실 되게, 누구에게든지 필요한 사람이 되며 그 사람들로 네 인생의 방명록으로 만들라. 는 부탁을 두고 왔으나 아들은 이미 모든 것을 품은 큰 산 같은 존재로 성장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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