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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1-11 00:00

행복의 조건

손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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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비스 이용자와 봄 구경을 나선 의성 사곡면화전리에는 꽃들이 손님을 맞고 있었다. 김밥에 몇 가지 과일과 커피를 준비하고 남편의 도움을 받아 자동차에 휠체어를  실었다. 가까이 살면서도 자주 나들이를 못하는 구순의 시어머니도 함께 모시고 갔다. 평일에다가 가까운 거리라 쉽게 목적지에 도착하여 남편에게 이용자의 휠체어를 맡긴 채 산수유 속으로 걸어 들었다. 

 

시어머니는 쑥이 나붓한 밭두렁을 끼고 오래 된 영상처럼 발걸음을 옮기는 내내 휠체어에 앉은 이용자가 부러운 눈치다. 모자까지 온통 빨강색으로 몸치장을 한 이용자와, 휠체어를 미는 남편의 자세가 앤디 워홀의 설치 작품처럼 생소하여 우리는 봄꽃처럼 웃었다. 엉거주춤 앉아 쑥을 캐는 며느리를 지팡이로 의지 한 채 물끄러미 바라보시는 시어머니는 한점의 정물화처럼 고요하다. 아지랑이 너머로 우리 일행이 사진작가의 시선을 잡고 있음을 알아차렸으나, 인물들의 특성과 노란 봄 들녘이 앵글 속으로 들어가서, 누군가의 영혼을 울리는 작품 되기를 바라며 혼자 알기로 했다. 우리가 의식 하지 못 할 거리에서 열심히 각도를 바꾸며 자리를 옮기는 작가를 가끔씩 바라보며 잃어버린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본다.

 

카메라를 의식하듯 늘 타인에게 길들여진 나는 아이들이 객지로 빠져나가자 공허감이 일상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바쁜 생활에도 놓지 못 하던 책을 무료한 시간들로 채우면서도 읽지 못한 것은, 몸과 마음은 하나였지만 스스로 금을 그어 자신을 가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혼자 섬으로 남았다는 자각이 들 쯤 살아오면서 간절했던 소망들을 생각하며 배우고 싶었던 것들을 시작했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지만 갑작스런 변화는 생각과 달리 오래 가지를 못했고 행복하지도 않았다.

 

칸트는 행복의 원칙 세 가지를“첫째, 일을 할 것. 둘째, 사랑을 할 것. 셋째, 희망을 가질 것”이라 했다. 두 아이들을 사립 대에 보낸 이유로 살림에 보탬이 되는 일을 했으나 자기중심적인 생활은 늘 마음을 지치고 허기지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반복되는 일상에 조바심을 치던 나에게 삶을 바꾸는 계기가 생겼다. 네팔에서 장애인들을 위해 애쓰시는 분을 만나면서 답답하기만 하던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스크린을 통해 방치 된 삶을 살고 있는 장애인들을 보며 설명 할 수 없는 아픔이 심장을 뛰게 했다. 그분과의 만남이 빈 박스를 줍기 시작한  동기가 된 셈이다. 

 

복음을 위해 장애인 재가 서비스를 시작한 일이 중증장애를 가진 사람들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갔다. 툭 툭 내 뱉는 질타에도 사랑의 온기가 묻어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내 안의 부족 했던 부분들이 채워져 갔다. 나 아닌 사람들을 위해 땀 흘리다 보면 크게만 느껴지던 자신의 상처가 치유되어, 열 마디 말 보다 작은 배려에도 감동하는 그들을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다.

 

어릴 때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고, 억울하게 누명 쓴 사람을 구해 주겠다는 꿈을 가지고 자란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뒤 돌아보니 10대엔 나이를 보태며 이유 없이 즐거웠고, 20대에는 전기불로 낮을 늘이며 가는 젊음을 누리고 싶었다. 그러나 마법에 걸린 듯 결혼을 하고 티격태격 사랑싸움과 고물고물한 자식들에 눈멀어 보낸 시간이 한 순간처럼 지나갔다. 세월은 도둑을 맞은 듯 마흔 줄에 들어서고, 아이들 교육으로 허리가 휜 채 쉰 문턱을 넘다 보니, 소주 한잔에 풀어지는 남편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는지 모른다.

 

그러던 내가 작은 꿈을 가지고 파지를 줍고부터 단 잠을 자고 웃는 일이 많아졌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 ”는 성경구절은 손수레를 끄는 일에 익숙하게 했다. 그동안 이용자와 제한 된 대화를 나누던 것이 만날 때마다 따뜻한 이웃들의 이야기는 덤으로 얻는 즐거움이다. 누군가를 돕기 위해 시작한 일이 고인 물처럼 활기 없던 이용자에게도 동참하는 기쁨을 주며 서로에게 희망이 된 셈이다. 사랑이 내 안을 채우고부터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낯설지 않고 숙기 없던 성격도 바뀌어 갔다. 시작과 끝이 하나로 보이기 시작 할 무렵 자신을 들여 다 볼 기회가 생겼고,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 비로소 세상과의 소통도 준비하게 되었다. 

 

예고도 없이 봄 구경을 함께 갔던 이용자로부터 “빈 박스와 캔이 많다”는 연락이 왔다. 전동 휠체어로 움직이는 그분의 마음이 고마워서 하던 일을 멈추고 달려갔다. 면민 체육대회가 끝나기를 기다리며 강가에 서니, 바람 간간이 일고 석양은 금빛 투망을 거둬들인다. 빛의 굴절이 건너편 도시를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것을, 잠시 바라보다가 어둠이 채워지기 전에 자리를 뜬다. 

 

행사를 끝낸 사람들이 서툴게 찍은 흙 백 사진처럼 정겹게 느껴지고, 드디어 나눔을 알아가는 자신이 마음에 들기 시작한다. 재가 서비스가 행복의 통로가 된 후로 빈 박스를 보면 보물을 만난 듯 즐겁다. 부지런히 박스를 절개 하고 쓰레기를 분리하는데 언제 왔는지 강 둔치를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비추는 사람이 있다. “밤낮으로 돈벌이 한다.”며 농을 던지는 사람은 사고로 두 다리를 잃었지만 밝고 자신감 넘치는 또 다른 서비스이용자다. 하루가 끝나는 시간 그분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건강한 내 웃음 받아 저문 강을 건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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